에스라 9장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한 에스라는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기쁨보다는 예루살렘의 어두운 영적인 현실을 보면서 침통해 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통혼이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방여인과의 통혼은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결해야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까지 널리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2절 말씀에 보면 “방백과 고관으로 불리는 지도자들이 이 통혼이라는 죄에 더욱 으뜸이었다고”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통혼이 일반적으로 퍼져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에서 떠나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이방여인과의 결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당시에는 이방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이방의 우상을 인정하며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표면적으로 그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우상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삶의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함으로 우상을 섬기고 우상의 가치관과 생각을 가지는 것으로 결국 그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사회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없는 불법과 불의가 넘치는 사회 즉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한 이유가 하나님을 섬지기 않고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죄악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6절 말씀에 보면 죄악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에스라의 심정이 나오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하나님, 너무나도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하나님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
과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김으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리고 다시 성전을 재건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심판의 길로, 다시 멸망의 길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러한 에스라의 통회하는 마음이 10절 말씀에도 아주 잘 표현되어 있는데 10절 말씀에 보면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오늘 본문은 에스라의 회개 기도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회개 기도와는 달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스라의 회개기도는 하나님께 차마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표현이 없습니다. 단지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가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너무나 큰 죄악이고 심각한 죄이기에 하나님께 차마 용서해 달라고 간구조차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절과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악에 대한 에스라의 애통하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15절 다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14)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복된 땅, 가나안 땅에서 추방되어, 이방 제국인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에서 돌아왔다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순히 고국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것으로만 끝나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도록 만든 우상들과 그리고 그 우상을 섬기면서 가지고 있었던 우상적인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해야 할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섬기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 가운데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자신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왔는지 깊이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왜 다시 성전을 재건하는 은혜를 받았는지, 그 이유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재건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에스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나온 과거 속에 하나님의 심판을 왜 당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선조들의 죄악의 역사를 반복해서 답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오늘날 교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성전재건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였습니다. 왜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성전을 재건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전재건을 통해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만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성전을 재건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워진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회 건물만 세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우리성도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며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세상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땅에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시설과 웅장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성도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룰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신 목적은 나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복음의 통로가 되길 원하셔서 우리들을 성도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목적, 구원의 목적을 잊어버리면 지도나 나침반 없이 사막을 여행하는 자와 같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며 또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