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장별설교

창세기38장(다말이야기)

오창어울림교회 2012. 6. 17. 12:07

 

 

창세기 38  

 

우리가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면 등급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중에 모든 연령이 볼 수 있는 전체 관람가가 있고 또 12세 이상, 15세 이상, 그리고 미성년자들은 볼 수 없고 19세 이상만 볼 수 있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있습니다. 오늘 38장의 말씀을 영화처럼 등급을 메긴다면 미성년자 관람불가 내용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복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성경을 보면 어떻게 이런 내용을 기록할 수 있나 할 정도로 읽거나 듣기 거북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8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부끄러운 사건 속에서도 우리들은 중요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요셉의 이야기를 하다가 그 요셉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유다 집안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이야기를 멈추고 유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먼저 37장의 요셉의 이야기와 39장의 요셉의 이야기가 상당히 시간적인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37장과 38장 사이에는 공통적인 주제가 있는데 37장에서는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고 그의 아들들에게 속임을 당하였고 38장에서는 아버지를 속였던 유다가 그의 며느리에게 속임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37장에서는 요셉이 죽었다는 증거로 그의 피 묻은 옷이 아버지에게 제시되고 있고 38장에서는 다말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유다의 도장과 허리끈, 지팡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37장에서 야곱이 요셉을 잃은 것처럼 오늘 38장에서는 유다가 자신의 두 아들을 잃게 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38장은 요셉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내용이 나오는 다음장 39장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38장의 다말의 이야기와 39장의 보디발의 아내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말은 죽은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해 아내로서의 최선을 다하는 여인으로 나오고 있지만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의 괘락을 위해 자기 집에 있는 요셉을 유혹하는 추악한 여인의 모습으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볼 때 오늘 유다의 가족이야기가 요셉의 이야기 중간에 들어간 것이 꼭 어색한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유다는 형제들을 떠나 아둘람에 가서 가나안 원주민인 수아의 딸과 결혼하여 세 아들 - , 오난, 셀라를 낳았습니다. 엘이 다말을 아내로 맞았지만 엘은 악하여 하나님의 징계로 일찍 죽었습니다. 엘이 죽은 후 당시 풍습을 따라 둘째 오난이 다말과 결혼하였지만 그도 역시 죽었습니다.

이렇게 아들들이 죽자 유다는 마지막 셋째 아들까지도 죽을까봐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후 다말은 청녀로 가장하여 자기 시아버지 유다를 기다렸습니다. 딤나로 양털을 깎기 위해 온 유다는 창녀인 줄 알고 다말을 범합니다. 염소를 주겠다고 약속하였는데 그 증거물로 도장, , 지팡이를 줍니다.

이후에 다말이 행음하여 임신하였다라는 말을 듣고 유다는 다말을 화형을 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3개월 전에 유다로부터 받은 세가지 증거물들을 보이며 이 물건의 주인을 통해서 임신하였음을 밝히게 됩니다. 이로써 다말의 행위는 남편 가문의 대를 이으려는 정당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유다의 가문의 참 비극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은 사실 유다의 실수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다는 자기 형제들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그가 형제들을 떠난 이유는 요셉의 일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1절의 시작이 그 후에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간 후에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파는 일에 깊숙이 개입했던 유다로선 그 죄책감이 컸을 것입니다. 또한 늘 슬픔에 잠겨 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이 아버지를 속였다라는 죄책감이 유다를 늘 괴롭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러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아버지와 형제들을 떠나 이방 땅인 아둘람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유다는 그곳에서 이방여인인 수아의 딸과 결혼을 합니다. 그가 이방여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과 결혼하게 되면 신앙이 다르고, 삶의 전통과 문화가 다르고, 삶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수한 삶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다는 자신이 지은 죄를 도피하려고 하였지만 도리어 그는 하나님께 더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유다의 가족은 더 큰 비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보면 자신이 죄를 짓고 난후 그 죄책감으로 인해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 더 큰 죄악 가운데 빠지는 자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단순히 그 죄를 잊으려고 하기보다는 그 죄를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는 다 같이 실패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은30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뉘우침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위대한 사도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죄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죄책감으로 인해 도피하기 보다는 그 모든 죄를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유다는 아버지를 떠나면 자신이 지었던 죄가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형제들과 집을 떠나면 평안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그는 더 큰 죄악의 수렁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범죄하였다면 단순히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시는 성도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유다는 더 큰 시험과 시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첫째 아들인 엘이 다말과 결혼하였는데 무슨 악인지는 모르지만 엘이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관습에 따라 둘째 아들과 결혼을 했지만 그 둘째도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다말은 친정으로 쫓겨났습니다. 다말은 너무나 억울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 두 아들이 죽은 것이 다말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유다의 두 아들이 죽은 것이 다말의 탓으로 여기고 그녀를 친정으로 보낸 것입니다. 다말은 참 억울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다말은 너무나 위험한 일을 벌이게 됩니다. 그녀는 창녀로 가장하여 자기 시아버지를 통하여 임신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다말의 행동은 도적적으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말의 이러한 위험한 일 가운데 신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유다의 가문에 자녀를 낳고자 하는 일입니다. 유다의 아들인 엘과 오난이 아들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셀라는 유다가 다말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다말이 유다의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라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그는 얼마든지 다른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말은 비록 이방여인이었지만 유다 가문의 자녀를 낳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창녀로 가장한 것은 어떤 자신의 쾌락이나 정욕에 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유다가문의 자녀를 낳아 아내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것과 그리고 유다가문에 자녀를 낳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다말의 이야기를 윤리적인 척도로 보기 보다는 한 여인이 한 가문의 흥망과 한 공동체의 미래라는 차원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유다 가문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죄를 범하고도 그 죄를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 큰 죄의 수렁에 빠지게 되고 더 이상 그 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 솔직히 나의 죄를 고백하며 늘 주님 앞에 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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